로단테 2021/09/23  ~ 2021/10/12

밀리온 폰 블리쉬, 러닝 중 그렸던 그림 로그 백업

(순서는 뒤죽박죽입니다...)

글 : 지인분 지원

친애하는 공작님께,

 오늘도 아인시히 제국에 내리쬐는 태양은 밝게 빛나고 나무들은 빛을 받아 싱그러움을 드러내고 있는 계절입니다. 저택을 관리하다보니 시간이 물흐르듯 흘러 어느덧 여름이 되었습니다. 언제나 보내시는 사람을 통해 소식은 받아보셨겠습니다만, 일이 어느정도 정리가 된다면 직접 편지를 써야겠다 다짐해 이렇게 펜을 들어 봅니다.

 아카데미를 졸업식 이후, 동거동락하던 동기들과 짧게나마 헤어짐의 시간을 갖고 아카데미를 졸업하면 블리쉬 가에 걸맞는 사람이 되라 말씀하셨던 지난 날의 약속대로, 제가 몸담고 있던 공작저 대신 당신께서 하사해주신 저택으로 발을 옮겼습니다. 오래되고 방치되어있었으나, 공작저의 별채이니만큼 그 위엄이 고스란히 느껴지더군요. 공작님께서 이를 제게 맡기신 것은 그 위용을 가꾸어 제국에 블리쉬 가의 명성을 다시 한 번 떨치라는 뜻일거라 여겼습니다. 저를 믿고 맡겨주신 일을 해내기 위해 제가 소지하고 있던 것들 중 값이 나가는 물건들을 모두 전당포에 팔아 기반이 될 제드를 마련했습니다. 홀로 자립하라 하셨으나 주어진 것들 중 제 것이 없으니 당신의 말을 온전히 따르지 못했습니다. 다만 공작께선 자비로움이 바다와 같으니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주실거라 믿습니다. 

 마련한 것으로 사용인을 구인하고, 건물을 보수하고 관리를 했습니다. 특히 공작님께서 자주 머무르셨다던 3층의 볕이 잘 드는 방은 더 정갈하게 관리하라고 거듭 지시를 내렸지요. 정원에는 티테이블을 마련하고 정원사를 고용해 정원수들을 가꾸도록 명령했습니다. 아름다운 정원에 작게나마 제가 좋아하는 은방울 꽃을 심었는데, 공작님께서 방문하실 때 즈음엔 꽃들이 다 자라나 대접하는 한 켠에 꽂아둘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럼 보고할 일이 있을 때 다시 편지하겠습니다. 오늘도 제국의 영광이 블리쉬 가와 당신에게 함께하는 날이 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295년 x월 x일 

밀리온 폰 블리쉬 드림

친애하는 당신께,

강녕하셨는지요. 봄바람이 불어 대륙에 활기를 불어넣는 나날들이 계속됩니다. 날씨까지 블리쉬 가를 위해 축복하는 것 같아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처럼 제 마음 또한 들뜨곤 합니다. 이렇게 편지를 적는 연유를 물으신다면, 특별한 일은 아니지만 보고해야할 것 같아 이렇게 펜을 듭니다.

 오늘은 의회 시험의 결과가 있는 날이었습니다. 당신께서 도움을 주겠다며 손을 내밀어주셨지만 과거의 약속은 일절 도움 받지 않고 스스로 일어나라 명하셨으니 이 또한 제가 짊어지고 이겨낼 시련이었습니다. 저는 노력했고, 그 기대에 부응하였습니다. 이번 시험에 합격해, 저는 앞으로 귀족 대표의 상원 자격으로 의회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아카데미에서 만났던 메테나 K. 말레오루스의 합격 소식도 알게 되었지요. 짧게 말씀드리자면, 메테나는 남부에 위치한 말레오루스 남작가의 영애로써 앞으로 블리쉬 가문의 정계 활동에 분명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의회에 블리쉬 가의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이 되길 원하였으니 그리하겠습니다. 황제 폐하의 신임을 사라 명하셨으니 그렇게 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한 가지 빠뜨린 이야기가 있어 사족을 덧붙히자면, 로트실트가의 새로운 후계자가 저를 종종 찾아오곤 합니다. 로트실트가의 일은 공작님께서도 당연히 알고 계실겁니다. 로트실트 가는 예로부터 저희 블리쉬 가의 대리인 자리에 있었으니 제가 예법을 직접 지도해주고 있습니다. 쓸데없는 일이라 생각하실지도 모르지만 그가 귀족 사회에 온전히 녹아든다면 로트실트 가와 이들을 후원하는 블리쉬 가 모두 더욱 빛을 발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그 덕에 가끔 고요하던 저택이 조금 활기를 띄기도 합니다. 

 하늘에 태양이 점차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오늘도 공작께서 평온한 밤이 될 수 있길 바라며 이만 편지를 줄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행하는 모든 일이 공작님을 만족시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296년 x월x일 

밀리온 폰 블리쉬 드림

친애하는 헤르안 공작 각하,

 평안하셨는지요. 비가 많이 온 탓에 아직 보수중인 별채 뒤뜰의 창고가 무너졌습니다. 다른 일로 신경을 기울이지 못한 탓에 일어난 일이라 상심이 크고 제 책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거운 하루입니다. 마음이 무거운 이유는 이 뿐만이 아니니 형님께서 오셔 제 자격을 논하시는 모습에 스스로 부족함을 느낀 하루였습니다. 보통은 이런 일은 보고를 드릴 필요는 없으나 오늘은 글을 쓰고 싶어져 이렇게 편지지 앞에 앉아봅니다. 

 기다리는 당신 대신 달갑지 않은 손님으로 무작정 방문하여 저택을 휘젓고 다니며 비와 흙이 묻은 더러운 신발로 지금은 고즈녁한 모습을 갖춘 이 저택을 걷는 모습이 당신의 이름을 구둣발로 짓밟는 기분이었습니다. 제게 와 이것저것 트집을 잡는 모습이 당신을 온통 부정하는 것 같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당신이 인정하는 후계자이며 저는 한낱 장기말에 불과하니 그의 말에 반기를 들지 않도록 인내하고 또 인내했습니다. 당신을 위해 꽂아 둔 은방울 꽃이 담긴 화병을 집어던졌을 때도 저는 묵묵히 인내했습니다, 그러나 의문을 가졌습니다. 

저는 알고 싶습니다. 어째서 유력한 가주 후보인 그를 두고 저를 입양해 오셨는지, 저를 데려오셨음에도 제게 기약 없는 기다림만을 요구하시는지. 저를 모두 버리고 일궈낸 모든 것들이 진정 의미가 있는 행동들인지. 그래서 당신께 인정받아 당당한 블리쉬 가의 일원이 될 수 있을지.

 ...그러나 이 또한 공작 각하께서 내려주신 시련일 것이라 믿습니다. 이 편지는 당신께 보내지 못할 것 같습니다. 저의 추잡한 욕망은 그 욕망을 담아낸 이 글과 함께 봉인해 제가 간직하도록 하겠습니다.

언제나 제국의 태양 아래 영광을 누릴 블리쉬 가를 위하여.

295년 x월 x일 

보내지 못한, 편지 42장.

주의 : 본, 로그에는 강압적인 상황 묘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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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지인분의 지원.

 많은 이들이 어린 시절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혹은 좋은 기억으로 남아 추억을 그리며 말하곤 한다. 그러나 밀리온에게 어린 시절이란, 기억하고 싶지 않으나 지독할 정도로 생생한 고통스러운 기억일 뿐이다. 블리쉬 가의 분가에서 태어나 귀족이었으나 푸른 눈이라는 이유로 무시당하며 평민만도 못한 삶을 살았다. 아이에게 필요한 사랑과 애정 대신, 그가 들어왔던 것은 녹색 눈이 아님을 한탄하거나 비난하는 이야기일 뿐이었으니 종종 그는 침대에서 그 때의 기억을 가지고 깨어나곤 했다. 

●   ●   ●

 영특했던 밀리온은 자신이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음을 알고 있었으나 그는 어린 아이가 내쫓겨 살아가기엔 이 사회는 잔혹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작은 체구의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숨을 죽인 채, 있는지도 모르게 방에 가만히 앉아있는 일이 전부였다. 그리고 어떻게든 버티기 위해 그들의 비위를 맞추었다. 익숙하게 집안일을 해내고 나이에 맞지 않게 어른스럽게 행동하는 건 그 시절의 괴로움을 반증하고 있었다. 그의 유일한 낙이라곤 우연히 주운 오래된 만년필로 버려진 종이에 별 볼 일 없는 시나 일기를 끄적이는 게 전부였다. 

 그럼에도 결국 그는 6살 나이에 내쫓길 뻔 했으니, 나이프를 쥐는 순서가 틀리다며 기본적인 식사예절조차 지키지 않아 블리쉬 가에 먹칠을 했다는 터무니없는 이유에서였다. 그들이 식사예절 따위를 알려준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억울함을 항변할 수도 없었다. 그랬다면 건방지다며 곱게 쫓겨나는 걸로 그치지 않고 잔뜩 매질만 당하면 다행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리베르트 님께서 그가 남몰래 중얼거리던 기도를 들었기 때문일까. 그 때 마침 헤르안 공작은 그를 양자로 데려가고 싶다며 찾아왔고, 공작의 말에 친가는 밀리온 덕에 콩고물이라도 받아먹을 수 있을 거라 기대하며 그를 팔아버리듯 보내버렸다. 이는 밀리온에게도 나쁜 일이 아니었으니 남은 옷을 대충 기워만든 옷 대신 최고급 비단으로 만든 맞춤옷을 입고 먹다 남은 음식 대신 일류 셰프가 만들어준 최고급 코스 요리를 먹으며 장작조차 제대로 지급되지 않아 추위에 떠는 대신 한겨울에도 이불을 걷고 잘 수 있을 만큼 따뜻한 잠자리는 그가 여태껏 누리고 살지 못했던 귀족의 삶이었고 고작 일부에 불과했다. 

 이유야 뭐가 되었든 밀리온에게 헤르안 공작은 구원의 빛이었으며 그 빛은 찬란한 에메랄드 색이었다. 그 색을 손에 쥐기 위해 그는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 시작이 바로 디하이트 아카데미의 입학이었다. 블리쉬 가의 힘이라면 어렵지 않게 비리로 입학할 수 있었지만 그는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정당히 겨루어 디하이트 아카데미 입학에 성공했다. 그는 자신을 블리쉬 가의 대표라 생각하며 가문에 누가 되지 않게 행동함과 동시에, 고단했던 시절부터 가지고 있던 꿈을 마음 한구석에 간직하고 있었다. 언젠가 정당하게 가문의 일원이 되어 꿈을 펼쳐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그는 자신의 손에 녹빛이 담겨있다 여겼고 점차 자신감을 가지고 가문을 위해 성심성의껏 노력했다. 

●   ●   ●

 그러나 이는 그의 착각이었으니 그는 가문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일들을 알게 되었다.

 올곧고 위대하게 보였던 블리쉬 가의 이면은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당연히 본가에서 직접 행한 일이 아닐 거라 굳게 믿은 밀리온은 이를 곧장 헤르안에게 전달했으나, 이를 묵인하고 있었던 헤르안은 쓸데없는 짓을 하지 말라며 오히려 밀리온을 질책했고, 이 모든 것을 주도하고 있던 장남 레온은 그를 비웃으며 말했다.

쓸모없는 사생아 주제에 건방지게 헤집지 말지? 장기말은 장기말 답게 있으라고.

 아, 밀리온은 그제서야 깨달았다.

 자신은 영원히 저들의 녹빛에 물들지 못할 거라고.

 아무리 발버둥쳐도 자신은 보험책에 불과하니 블리쉬 가문에, 헤르안 공작에게 인정받을 수 없다고. 그러나 이 사실을 알고도 그는 여전히 그들의 녹색을 동경했다. 사람은 갖지 못하는 것을 바라볼 때 오히려 갖기 위해 애를 쓴다고 하던가. 밀리온이 딱 그런 꼴이었다. 그는 절망했다. 자신을 이뤄온 것들이 무너지고 가치가 없다고 느꼈다. 허무함은 그에게 분노를 몰고 왔으니 분노의 화살은 자신의 푸른빛을 향했다. 하늘의 청량함과 같아 좋아하던 푸른색이 이제는 자신을 가라앉히는 심해의 색과 같다며 증오했다. 거울을 마주 볼 때마다 보이는 제 푸른 눈을 파해치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아냈다. 어떻게 해도 그들과 같아질 수 없다고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무의미하게 보내던 어느 날.

 그는 문득 깨달았다. 어차피 사랑과 애정은 예전에도 지금도 없었으니 실망할 필요도 없었다. 가진 적 없는 것을 갖지 못했다고 슬퍼한다면 이 얼마나 멍청하고 시간 낭비란 말인가. 가족들과 형제자매들은 물론, 사용인들에게 조차 무시당하는 자신이 그들과 같아지리라 생각한 것이 얼마나 어리석었던 일인지 깨닫게 되었다. 그러니 그는 그들에게 완전한 블리쉬 가의 일원으로 인정받기 위해 행동하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대신 그들이 원하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훌륭한 장기말이 되어 가문을 위해 일하고 냉대와 모욕마저 블리쉬 가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짊어지겠다고 마음먹었다. 

가문의, 가문을 위한 사람이 되는 데에 자신은 필요 없었다. 

주의 : 본, 로그에는 강압적인 상황이 묘사되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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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pengpeng_bak 커미션

 블리쉬 영지의 소작인들은 그리도 충성이 대단하다지요. 영지의 소작료가 그리 명이 드높아도 대륙 어디에서든 블리쉬 령領에서 떠나간 자들을 찾을 수가 없다지 않습니까?

●   ●   ●

 바람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법이라. 풍문 또한 바람을 타고 날아다녔으므로 그것이 사교장에서 영지로, 블리쉬 공작 저로, 끝내 밀리온 폰 블리쉬의 귀로 흘러 들어가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풍문은 풍문이었고, 들추던 이들이 흥미를 잃으면 사그라들 물에 젖은 불씨에 불과했다. 밀리온은 언제나 가문의 누가 되지 않도록 숨죽여 살 것을 배웠으므로 평소 같았다면 신경 쓰지 않았을 터다. 다만 한 가지, 상단의 부흥으로 블리쉬 가는 그야말로 전성기, 전무후무할 대전성기를 이루고 있었으므로 밀리온은 불씨에 얹힌 것이 물 따위가 아니라 기름일 가능성을 떠올렸다. 바람이 멈춰 가라앉지 않는다면. 대륙 저 너머까지 불씨가 퍼진다면. 가문의 누가 되지 말라. 밀리온은 가르침을 상기했다.

 가주인 헤르안 폰 블리쉬 공작과 장자인 레온 폰 블리쉬 백작은 상단이나 그를 배우는 일로 바빴으며 풍문 따위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으므로 밀리온은 이 일이 그야말로 자신의 마땅한 쓸모라 생각했다. 불씨를 꺼트리면, 바람을 잡아다 땅에 가두면, 그리하여 소문이 돌았다는 사실조차 없던 일로 만들면… 공작 저는 언제나 그 견고함을 유지할 것이다. 구석을 만든 벽돌 하나에 제 이름 한 글자 정도야 새길 수 있을 것이다. 밀리온은 나갈 채비를 했다. 문을 열었다.

●   ●   ●

 밀리온은 대동할 수행원 하나 마차 하나 얻지 못하였으나 익숙한 일이었으므로 감히 바라지도 않았다. 밀리온은 걸었다. 공작 저가 굳건한 언덕 아래로, 다시 아래로, 가장 낮은 곳으로. 저택의 불빛 하나 닿지 않는 황망한 대지에 다다르면 이질감을, 아니 기시감을 느꼈다. 순간 울렁였다 가라앉았다. 밀리온은 뒤 돌았다. 공작 저는 이제 흐릿한 윤곽마저도 보이지 않았으므로 이곳이 블리쉬 령의 땅이 맞는가, 하면 낡은 표지판만이 그 대답을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곳은 영지였다. 돌길이 깔렸고, 건물이 들어섰고, 환영받지 못한 유약한 짐승 떼 따위가 골목을 점거했고, 인적 없음에도 생활감이 있었다. 밀리온은 온기 하나 없는 공간을 헤맸다. 지성 있는 생명을 찾았다.

 미로나 다름이 없었다. 수 번을 지나쳐 돌바닥에 난 흠집의 생김새조차 외워버린 골목에서 밀리온은 겨우 하나의 인영을 찾았다. 실례합니다. 다 삭아 안이 텅 비었음이 확연한 나무 상자를 살피던 것에 손을 뻗었다. 인영은 태어나 처음 세상의 소리를 접한 사람처럼 놀랐다. 황급히 거리를 벌렸다. 간극, 인영은 밀리온은 살폈다. 가지런히 정리된 백금발, 윤기가 나 부드러운 살결, 멀끔히 다려진 옷과 광이 나는 구두, 단숨에 밀리온이 공작 저에서 왔음을 알았다.

저는, 저는, 저는 영지를 떠날 생각이 없습니다!

 비명은 단말마다. 괴로이 울부짖던 것이 밀리온을 밀쳤다. 인영은 곧장 또 다른 골목으로 뒤돌아보지도 않은 채 달렸다. 순간 중심이 휘청였다. 폐허에 마땅히 붙잡을 것은 없었으므로 밀리온은 널브러지듯 주저앉았다. 맨바닥이나 흙먼지는 반드시 불결하지만은 않았으므로 손에 묻은 먼지를 털면 곧장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 밀리온은 대수롭지 않게 옷에 붙은 것들을 털어냈다.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다시 헤매기 위하여 방향을 돌렸다.

순간 발에 챈 것은 우연이었다.

 밀리온은 그것을 집어 들었다. 이곳에서 났으리라 감히 믿을 수 없는 고급지, 그을려 찢어진 자국, 익숙한 달필.

…귀하.

이사… …도와… …뵙겠습니다.

 밀리온은 눈을 굴렸다. 부정을 품 안에 고이 접어 넣었다. 필연 아닌 우연은 없는 법이었다.

●   ●   ●

 그리고 밀리온은 말 그대로 내동댕이쳐졌다.

 헤르안 폰 블리쉬는 고상했다. 헤르안은 표리부동한 것은 언제든, 어떤 결과로든 드러나게 된다 여겼으므로 겉으로 보이는 만큼 속내를 꾸몄다. 그러므로 그 속은 부드럽지 않았으나 거칠다고도 할 수 없었고, 밀리온은 혼란스러웠다.

불경한 것!

 누가 네게 이런 것이나 뒤쫓으라 하였느냐! 밀리온은 상황도 감정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한 채로 들려오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조각나 철자 하나하나 읽을 수 없이 흩어진 글귀가, 글이라 하기에도 어려운, 안료로 이루어진 잔해가 흩뿌려졌다. 날았다. 밀리온은 조각을 쫓았다.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니까, 저는…. 목을 붙잡혀 눌리기라도 한 것처럼 목이 울었다. 짓누르는 중력을 느꼈다. 끝내 밀리온은 고개를 숙였다. 이 바닥은 원래도 이런 색이었던가. 지독히도 어울린다 생각했다.

 얌전히 움츠리고 살거라, 밀리온. 네게 바란 것은 그뿐이었거늘…. 네 놈 하나 때문에 레온까지 꼬리를 밟히면 이 가문이 어찌 될 것 같으냐?

 밀리온은 신중을 알았고 신중해야만 할 순간을 알았으므로 이제 스스로 제 목을 잡아 눌렀다. 꺼내고 싶었던 소음을 욱여넣었다. 삼켰다. 네가 정녕 나까지도 모욕할 셈이냐? 비수는 날카로웠으므로 밀리온은 눌렀던 것을 떼어냈다.

…죄송합니다.

 헤르안은 분을 삭였다. 발소리가 들렸다. 밀리온은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했으나, 아니 않았으나 헤르안은 원인을 피하는 것으로 마음을 가다듬고는 했으므로 헤르안이 이 공간을 떴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러므로 남은 것은 자신과 헤르안 뒤에 숨듯 서 있던 레온 폰 블리쉬 둘 뿐이었다. 밀리온은 고개를 들었다. 초록과 파랑의 시선이 마주치면 파랑은 그를 피했다. 다시 고개를 숙였다. 흐응. 가벼운 비음이 들렸다.

네 친부가 블리쉬의 성姓을 가진 것은 맞나?

 암전. 의식하면 시야가 반전되었다. 이 사생아 자식이 무슨 짓이야. 다리 아래 짓눌린 레온이 신음했다. 밀리온은 왼손을 그 목에 가져다 대었다. 무게를 실었다. 자유로운 손을 주먹 쥐어 뒤로 뻗었다. 이대로 내리치면 저 입이 고통으로 신음할까. 제가 그랬던 것처럼 당신도 나가떨어져 내동댕이쳐질까. 그 눈이 감길까. 밀리온은 망설였다. 그러는 동안 다시 초록과 파랑이 마주한다. 초록이 이긴다.

 틈을 탄 레온은 밀리온을 밀쳤다. 본래 향해야 할 방향으로 시선이 내리꽂힌다. 불결하게. 잠시라도 내려다보였음이 수치가 되어 귀 끝까지 붉어진 레온이 그를 피했다. 밀리온은 홀로 남겨졌다. 태어나 처음으로 피가 들끓음을 느꼈다. 그 온도가 과히 뜨거워 데일 정도였다고, 밀리온은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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