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지인 지원

주의 :영구 부상에 대한 서술이 포함되어있습니다.

빌레타 40년은 다른 해에 비해 유독 바쁜 해였다. 기존 숙련 대원들의 대다수 사망, 부족해지는 자원, 다가오는 극대기. 모든 것들을 대비하기엔 남아있는 사람도, 시간도, 모든게 모자랐다. 견습대원에 불과했던 믹을 포함한 그의 동기들은 이런 상황 속에서 제대로 준비조차 할 수 없이 숙련대원의 일들을 떠맡아야했다. 은퇴하거나 행정부로 이관했던 이들도 전부 복귀한 마당에 불평을 할 수도 없었고, 부족한 인력탓에 탐사는 커녕, 점점 강해지는 메테르들을 상대로 줄어드는 자원을 최대한 활용하며 버티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믹은 빌레타의 상황과는 별개로 다행이라 여겼다. 탐사를 나가지 않으면, 다가오는 메테르만 해치우면 되니까. 일부러 죽음 속에 뛰어들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사람들에게는 허풍을 떨었지만 믹은 여전히 메테르가 무서웠다. 그래서 그는 루멘이 싫었다. 죽고 싶지 않으니까! 그리고 어차피, 메테르를 무찌르는건 맥과 메릴이 할 일 아닌가? 자신이 책임질 필요 없는 일이었다. 다른 사람이라 봐도 무방할 자신의 능력들은 유능해서, 그들에게 맡겨두면 대부분 일들이 해결되었다. 기억나진 않지만, 비록 다른 사람 같지만 그건 어쨌든 '나'니까. 그래서 믹은 끊임없이 자기합리화를 하고 능력에 의존했고 모든건 '믹'이 한 일이라고 말하고 다녔다.

 동시에 그는 능력들을 싫어했다. 정확히는 질투했다는 말이 맞았다. 아이러니했다. 자신의 능력을 질투하는 루멘이라던가, 정작 조금만 스스로 해결하기 어려워도 능력을 꺼내는, '믹 알폰스'가 스스로 한 건 하나도 없는데도. 

"난 루멘이 되고 싶다고 한 적도 없는데요? 그냥 평범한 사람이고 싶었다고요."

 그러나 사람들은 이를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그야 빌레타는 루멘이 매우 부족했고, 믹이나 맥이나 메릴이나 그들 눈엔 다 똑같은 '믹 알폰스'로 보였으니 그의 말이 사실이건 아니건 개의치 않았다. 그를 말리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믹의 거짓말은 날이 갈 수록 심해졌고, 늘어났다.

*  *  *

 그러나 뿌린대로 거둔다고 하던가, 그 날도 맑은 날씨였다. 하늘은 고요했고, 적당히 기분 좋은 바람이 불었으며, 주변은 사람들로 시끌벅적했다. 꼭, 자신이 유명세를 얻기 시작한 날처럼. 똑같이 할아버지를 보러 갔고 여느 때처럼 자랑스러운 손자라는 칭찬을 받고 끔찍히도 가기 싫은 트라이안테 본부로 귀환하면 되는 날이었다. 분명 그랬어야했는데, 4년 전과 같은 비명소리가 들렸다. 4년 전 뿐 아니라, 지금까지 트라이안테이서 근무하며 들었던 모든 비명소리가 동시에 귀를 댕댕 울리는 것 같았다. 

 그의 할아버지가 일하는 가축 목축장, 어떻게 들어왔는지 모를 알타이르 3마리가 사납게 사람들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믹은 앞뒤 안 가리고 도망가고 싶었다. 방패도 없는데 뭘 어쩌겠어! 그러나 지금 도망가면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겠는가? 여태까지 했던 거짓말들은 눈덩이처럼 불어나있었고 특히 기대를 받고 있는 기수인 만큼,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그랬다간 사람들이 거짓말쟁이라며 온통 손가락질 할 것 같았다. 이미 거짓말쟁이면서. 게다가 어쩌면 할아버지가 계실지도 몰랐기 때문에, 믹은 곧장 맥을 불렀다. 팀원도, 다른 트라이안테 대원들도 보이지 않았으니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다치는건 어쩔 수 없는 일일 수 있어도, 할아버지에게 큰일이 나면 안되니까, 그런 이기적인 마음으로.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난 고작 '믹'인데. 이번에도 맥이 대신 해주겠지. 맥은 뭐든 해냈으니까.

 맥은 신나게 알타이르를 상대했다. 방패는 없었지만 호전적이었고 알타이르는 지금껏 몇 번 잡아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맥은 조금 고전했지만, 알타이르 한 마리를 때려잡았다. 피냄새만 나지 않는다면 흉폭해질 일이 없으니까, 어쩌면 안일한 생각을 했었을지도 모르겠다. 제 상처가 하나둘 늘어나는 줄도 모르고 그 때마다 알타이르는 큼직한 꽃잎 아래 돋아난 이빨 같은 것들을 달그락거리며 뻗어난 다리들을 움직였다. 점차 포악해지는 나머지 알타이르는 ‘가드득, 가드득’ 거리는 괴상한 소리를 내며, 꼭 머리를 물어뜯을 듯, 맥에게 달려들었고, 맥믹은 순간 얼어붙었다. 그리고 소리쳤다. 

“아무도, 아무도 …. 제발, 아무도 없어요….?! 제발…”

 그러나 이미 사람들은 그를 믿고 모두 떠난 후였고 외친 단말마가 메아리쳐 들릴 정도로 주변은 공허했다. '단신으로 메테르를 쓰러뜨린 루멘', '뭐든 유능한 그의 다른 분신들', '장래가 기대되는 기수의 대원'. 모든 수식들은 죽음을 앞둔 이 상황에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아, 양치기 소년의 이야기의 마지막이 어땠더라?

 후회할 시간조차 없었다. 순간적으로 그는 왼팔을 들어 앞을 막았고 격통이 팔을 타고 흘렀다. 비명을 지르고, 바닥에 떨어져서 멀리서 들리는 요란한 소리들을 끝으로 그는 기절하고 말았다. 우습게도, 그 와중에 사람들이 뭐라고 자신을 손가락할지 걱정하면서.

*  *  *

 공개 기록: L-616

믹 알폰스. 18세. 남성. (빌레타 41년)

메모. 스캬마리 구조 이후, 해리성 정체감 장애(다중 인격)를 앓고있음.

상담 이유 : 빌레타 41년, 농업구역에서 3마리의 메테르와 혼자 대치후, 극심한 중상및 불안증세 발발. 

상담시작,

상담 중 - 해리성 정체감 장애(다중인격) 이 있는 것으로 판단.

ㄴ 스캬마리 구조 이전, 원인으로 눈 앞에서 믹 알폰스의 양부모의 사망정황 목격.

ㄴ 정신적으로 한계가 몰릴때마다 정신이 와해되는 것을 막기위해 인격이 새로이 작성되는 케이스로 판단 중.

ㄴ 각별한 휴식이 필요하다고 판단. 41년 xx월 xx일 이후로, 믹 알폰스, 휴식을 권고함. 

*시간이?없어서...? 많이 타협?했더니, 뒤가 흐지부지되어버려서...? 날조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뒤는... 상상에 맞기겠습니다...)

글 : 지인 지원

 믹 알폰스는 쉽게 말해서 심약한 사람이었다. 같은 기수의 동기들이 점차 성장하고 트라이안테 대원으로서 거듭날 동안, 그에게는 큰 변화가 없었다. 물론 나쁜 길로 빠져들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겠으나 트라이안테는 빌레타의 존망을 책임지는 집단이었으므로 두려움은 극복하고 시련을 딛을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믹은 책임지는 일에 익숙하지 않았고 누군가의 기대를 받는 일이 부담스러웠다. 그는 스스로를 갉아먹는 걱정과 불안감으로 고민하기 시작했고 이 때 믹은 직면한 문제를 회피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몸이 좋지 않아서, 능력이 불안정해서 같은 사소한 이유를 대다가, 졸업을 1년 앞둘 때 즈음부터는 할아버지가 아프셔서, 집에 우환이 있어서 따위의 책임질 수 없는 거짓말로 외출을 일삼았다. 

믹 알폰스가 일을 치르게 되는 날도 별로 다르지 않았다. 그는 그저 할아버지가 보고 싶었고, 고학년이 되어 외출을 자주 할 수 있다고 믿는 심성 좋은 노인은 그에게 작은 심부름을 맡겼다. 8구역 남동쪽의 외곽에 위치한 집은 할아버지의 지인이 사는 곳으로, 믹이 워낙 자주 드나들어 제 집과 같은 곳이었다. 땡땡이를 치기도 했고, 주변 공기가 조금 미묘한 것 같았지만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 마저 잊을 정도로 맑은 날씨였다. 하늘은 고요했고 적당히 기분 좋은 바람이 불었으며, 주변은 사람들로 시끌벅적했다. 어쩐지 들뜨는 기분에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걷는 길은 그야말로 완벽한 하루라해도 무방했다. 그러나,

“꺄아아악! 메테르다!”

찢어지는 비명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잊을 수 없는 메테르의 포효 소리와 함께 구름처럼 나풀거리던 기분은 순식간에 진창에 처박혔다.  믹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머릿속에선 당장 일어나 도망가야한다 외치고 있었으나 발이 땅에 박힌 듯 도무지 움직일 수 없었다. 하다못해 능력이라도 사용해보려고 했으나 평소엔 어렵지 않던 변신이 오늘따라 마음대로 되지도 않았다. 애써 정신을 차려 겨우 한 걸음 뒤로 물러섰을 때는, 이미 눈 앞에 메테르가 보라색 눈을 번뜩이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뇌리에 ‘끝’이라는 단어가 스쳐지나가고 눈을 질끈 감아 고통 없이 지나가길 바랄 뿐이었으나,

 소리가 공포를 대신할 뿐이었다. 도저히 눈을 뜰 자신이 없어 한참을 가만히 있었으나 여즉 아무렇지도 않아 실눈을 뜨니, 집체만한 메테르가 제 앞에 쓰러져있는게 아닌가. 주위엔 무기도, 능력의 흔적도 없었다. 분명 직전까지 시퍼렇게 눈을 뜨고 있던 메테르와 자신만이 그 자리에 남아있었다. 얼떨떨한 상태에서 겨우 몸을 일으키자 뒤늦게 따라온 트라이안테 대원이 믹을 발견하곤 아는척을 했다.

“얘, 괜찮아? 어, 너 헤르난 아카데미에 다니는 애지?”

“...네.”

“천만 다행이네. 네가 마무리한거야?”

“...네.”

“대단하네~. 고생했어. 얼른 돌아가. 혹시 다쳤거나 아프면 꼭 말하러 와야한다?”

 믹은 분명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이 메테르를 무찔렀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에게 격려와 칭찬을 아낌없이 주었다. 믹은 입가에 작은 미소를 띄었다. 사람들이 제게 거는 기대가 더 이상 부담스럽지 않았다. 그래, 믹은 메테르를 쓰러뜨렸다. 어떻게 쓰러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 메테르가 쓰러졌을 때 근처에 있던건 자신 뿐 아니었는가? 소문은 믹의 입을 통해 믹의 할아버지에게로, 옆집 형, 사육사 동료 등에게로 순식간에 퍼져갔다. 믹은 어느새 ‘아카데미를 졸업하기 전에 메테르를 쓰러뜨린 루멘’ 이 되어있었다. 이 얼마나 손쉬운 방법인가? 영웅이 되기 위한 뼈를 깎는 노력? 희생정신? 그는 단 한마디의 말로 영웅이 되었다. 

그 날, 믹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뭐 어떤가? 들키지만 않으면 되지.

@pengpeng_bak 커미션

아담이 경작하고 이브가 길쌈할 때, 귀족은 어디에 있고 평민은 어디에 있었는가?

 - “When Adam delved and Eve span, Who was then the gentleman.” , John Ball

●   ●   ●

 술 좀 그만 마셔.

 객관적으로, 카르디 대공 저는 넓었다. 그에 더해 이미 달이 하늘의 정점을 찍고 지기 시작한 시간은 인간의 무의식을 지평선 아래로 이끌었으므로 적막 그 이상의 고요함이 온 방을 잠식했다. 응접실도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적어도 밀리온 폰 블리쉬와 루이 엘 테일러는 아스티카의 말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술 좀 그만 마시라고.

 밀리온은 잔을 내려두었다. 탁자의 면에 잔의 유리 바닥이 닿도록, 그러나 끝내 닿게끔 두지 않고 다시 들어 올렸다. 잔은 비었으나 검붉고 반투명하게 흘러내린 액체가 무색의 유리에 닿은 빛을 붉게 반사했으므로 무엇이 그 안에 담겨있었는지는 자명했다. 게다가 바로 그 옆에 그보다도 직설적으로 내용물을 알리는 라벨이 붙은 검은 병이 자리하기도 했다. 밀리온은 병을 들어 올렸다. 그만 마셔, 그리 들린 말은 이미 지나간 시간에 묻었다. 으깨어져 발효된 과실이 잔을 채웠다.

카르디가 술값이 너무 나온다고 마시던 놈들 다 나오래.

….

 재차 절주를 권하는 말에 루이는 말없이 밀리온에게 시선을 두었다. 묶이지 않은 족쇄가 갑갑했으므로 이미 채워 돌이킬 수 없는 것을 홀짝였다. 단번에 잔이 비었고 그와 동시나 다름없을 간극을 두고 다시 잔이 채워졌다. 습관은 무의식이기도 했고 무의식은 언제나 의식을 앞섰다.

 실례합니다.

 열린 문에 주먹을 가볍게 맞대는 소리, 그리고 낯선 음성이 다시 한번 적막을 깼다. 밀리온은 그 이름까지도 일일이 기억하지는 못했으나 그가 대공 저의 사용인 중 하나라는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급한 서신입니다. 그는 모인 이들에게 묵례하여 양해를 구했다. 밀리온은 그가 내민 것을 받아 들었다.

블리쉬 상단에 하플러 자작이 방문했습니다.

 그것은 서신이라기보다는 대강 종이를 찢어 아무 곳에나 손을 뻗어 집힌 필기구로 갈겨 쓴 쪽지에 가까웠고 미사여구 하나 없는 간결이었다. 밀리온은 문장의 끝에 찍힌 종결점을 응시했다. 가볍게 힘주어 서신을 구겨 소중하게도 손안에 쥐었다. 밀리온은 정말로 탁자에 잔을 내려두었다. 자유로워진 손으로 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널브러진 외투를 들어 팔을 끼웠다.

 상단에,

밀리온은 겨우 한쪽 팔을 끼운 채로 입을 열었다. 동시에 아직 자리를 떠나지 않은 사용인에게 손짓했다. 급히 나갈 채비를 하는 자가 전할 말은 한정적이었고, 그들은 구태여 음성으로 덧붙이지 않아도 사람의 의중을 알아차렸다. 그는 방에 들어설 때와 같이 묵례했고 방을 나섰다.

…중요한 손님이 왔다고 합니다.

 애써 지은 웃음이 어색하게 삐뚤어졌다. 다분한 취기가 한마디 말에도 스몄다. 밀리온은 갈지자걸음으로 사용인이 나선 발자국을 그대로 따랐다. 제대로 입지 않은 외투의 자락이 바닥에 끌렸고 그를 밟는 바람에 몸이 크게 기울었다. 균형을 되찾고자 짚은 손이 탁자를 때렸다. 빈 잔이 넘어졌고 탁자 위를 구르다 융단 위로 떨어졌다. 맨바닥이 아니라 다행이라 여길 생각이 비집을 틈조차 없었다. 그러니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밀리온은 그렇게 말했다. 말했다고 여겼다.

●   ●   ●

 당겨진 고삐에 말이 굽을 옮기기를 멈췄다. 턱 막혀 뱉은 숨이 목적지에 도착했음을 알렸다. 마부가 그를 전하기도 전에 밀리온은 바삐 마차의 문을 열었다. 오래된 경첩이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리며 삐걱거렸다. 올랐던 것을 되풀이하듯 발판을 밟았다. 하나, 둘, 다시 하나. 그리고 흙을. 백은의 쇳덩이가 의식을 지배하는 시간 급히 준비된 것은 그곳의 주인이 몸을 담고 왔다기에는 초라했으나 그만큼 급히 그곳을 찾을 이 또한 그뿐이었으므로 마중할 이는 마차의 문이 열리기 전부터 고개를 숙였다. 그러니 어찌 의심할 수 있겠는가? 그곳의 고용인은 누구든 유능한 인재이며,

 하플러 자작께서 사람을 찾았습니다.

 어떤 이를 찾았습니까?

 존재하지 않는 사람을 찾았습니다.

 충직한 사자使者임이 틀림없음을.

 자작께서 타고 오신 마차는 떠났습니다.

 자작께서는 떠나지 않은 모양입니다만…. 덧붙인 말 뒤로 침묵이 흘렀다. 애초에 달갑지 않은 인연이었다. 상황을 파악하는 데에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으므로 밀리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공존이 확실함에도 누구도 존재를 모른다면 그는 어디에 있는가? 밀리온은 확신했다. 하플러가 파헤치는 자라면 밀리온은 설계자였으므로 하플러가 향했고 밀리온이 향해야 할 곳은 오직 한 곳이었다.

●   ●   ●

 그곳은 언제나 지하에 숨겨지듯 그리고 숨기듯 자리했다. 창 하나 낼 수 없는 공간이었으나 조잡하게도 덧댄 목재의 숨구멍 사이로 희미한 빛이 어스레히 비치곤 했다. 사그라드는 어둠과 타오르는 빛이 교차하는 시간은 푸른빛을 띠었으므로 진저리 나는 시간이다, 밀리온은 그렇게 생각했다.

 무거운 공기가 덜미를 짓눌렀다. 밀리온은 숨을 죽였다. 그곳은 분명한 창고였으므로 제자리를 찾지 못한 물건이 쌓이거나 쌓인 것이 제자리를 찾아 매번 크고 작은 움직임이 있는 곳이었으나 그와는 다른 이질감을 느꼈다. 밀리온은 눈에 띄는 것보다 눈에 띄지 않는 것에 집중했다. 예컨대 삼나무 판자를 덧댄 암적색 바닥, 흩뿌려 장식하듯 난 얼룩, 기묘한 끊김, 어울리게도 검붉은 섬유로 이루어진 낡은 융단의 접힌 끄트머리, 그 아래 숨겨진 것, 나뒹구는 오래된 잠금장치 따위를. 밀리온은 장막을 모조리 걷어냈다. 쥐가 나오지 않거든 직접 거두는 수밖에 없었다.

 오래된 목재가 비명 하듯 삐걱였다. 얼마나 대단한 것을 상의하려고 이런 시간에 이런 곳으로 불렀지? 기시감이 엄습했다. 밀리온은 뒤를 돌았고 당연하게도 지나온 자리를 메운 공허와 어둡고 푸른 빛과 마주했으므로 몸을 되돌렸다. 돌아본들 무엇도 없을 공간을 안다. 그러므로 밀리온은 다시 돌아보지 않았다.

 통로는 통로보다도 동굴 같았고 고여 든 물이 썩어 그 주변까지도 산화한 역한 내가 코를, 아예 머릿속을 찔렀으나 밀리온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보다 역할 것이 존재한 탓이다.

 지금껏 잘해오지 않았던가.

 의심을 불러 뒤를 밟힌 것은 실책임이 분명했고 이미 과거 혹은 경험으로, 기억으로, 역사로 기록된 일이었겠으나 기록은 지워지고 태워지는 법이었다. 그러므로 모두 지우거나 가리고 나면 되는 일이었다. 진정 바라던 초록을 담을 수 있다, 밀리온은 믿었다.

하플러 자작.

 그러므로 순수에 다른 색이 섞이도록 둘 수는 없었다. 불청객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길고 깊은 공간 속에서 메아리치다 사라졌다. 밀리온은 통로의 날개를 이루는 뼈마냥 즐비한 철창 사이를 걸었다. 고르지 못한 바닥에 구두 굽이 부딪히거나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엇박으로 울렸다.

 셋으로, 다시 셋으로. 하플러는 가장 안쪽의 철창살 앞에서 그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곳은 다른 다섯의 방과 마찬가지로 텅 비어있었으나 누군가의 마지막 영원의 침실이기도 했으므로 덮인 이불이 여태 흔적을 남겨두기도 했다. 하플러는 막 사자의 단잠을 깨우려던 참이었으므로 최적이거나 최악의 때임이 분명했다. 밀리온은 한숨을 삼켰다.

 어떤 상단도 이런 시간에 운영하지는 않을 텐데 말입니다.

자작께서 그러한 보편을 모르실 리는 없고. 그러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으므로 밀리온은 불유쾌함을 숨기지 않았다.

 자작, 약조하지 않았습니까. 블리쉬가 무릎을 굽혀 기꺼이 자리를 마련해드리겠노라고. 아무래도….

 동부의 냉대가 그리 시리지만은 않은 모양이지. 누구도 기꺼운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동시에 누구도 기껍지 않음을 날 선 말이나 행동 따위로 드러내지도 않았다. 밀리온은 한 발짝 앞으로 옮겼다. 한 손을 뻗고, 다른 한 손을 등 뒤로. 낯에 호의를 떠올렸다.

 하루 만에 풀어야 할 회포가 적잖게 쌓인 듯한데, 이런 차가운 창고 말고 상단의 응접실에서 정식으로 맞이하겠습니다, 자작. 작일 자작께서 내주신 홍차에 대한 보답으로라도 말입니다.

 밀리온은 또 한 발짝을 내디뎠다. 방심하기를 바랐다. 허리춤에 매달린 날붙이는 길지 않았으므로 깃을 잡아챌 수 있을 만한 거리가 될 때를 기다렸다. 그러나 언제나 간절한 쪽은 여유롭지 못하고, 방심은 부족한 긴장으로부터 오는 법이다. 간절함은 밀리온에게로, 긴장은 하플러에게로 기울었으므로 하플러가 들고 있던 등의 빛이 드러난 검신을 비춘 것은 순간이었다. 반짝임은 유일한 이질이었다. 생명은 태어남보다 짧은 순간에 끝을 고하는 법이었고 하플러는 망설일 수 없었다. 그는 밀리온을 밀치고 그 너머로 뛰어들기를 선택했다. 동시에 밀리온도 판단해야만 했다. 쥔 검이 내질러졌으나 섬유의 조직을 찢은 것이 고작이었다. 균형을 잃은 몸이 휘청이다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흙과 부패한 오물 따위에 뒹굴었으나 이미 열 걸음쯤 뒤처졌으므로 매무새를 가다듬거나 삿된 것들을 털어낼 틈이 없었다. 밀리온은 일어났다. 걸어왔던 길을 따라 셋과 셋으로 나뉜 감옥을 지나치고 계단보다는 발판에 가까운 판자를 디뎌, 보다 높은 지하로, 바깥으로. 밀리온은 숨 쉬는 법조차 잊었다. 문을 두드리기 직전에 심해로 추락할 수는 없었으므로 늦지 않음이 간절함이 되었다.

히힝.

 그러니까, 그리 머지않은 곳에서 마차를 끄는 말의 울음이 들리지 않았더라면. 밀리온은 몰려드는 깨달음을 떨칠 수 없었다. 늦었다. 대공 저는 그가 자리한 곳보다 남쪽에 있었으므로 밀리온은 지는 달을 오른편에, 뜨는 해를 왼편에 두었다. 겨우 숨을 쉬기 시작한 새벽은 여전히 적막했고 방향이 정해지거든 걸음을 옮길 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구두의 코에 곧바로 다른 발의 뒤축이 붙었다. 두 걸음, 그리고 멈췄다.

…실례합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   ●   ●

 푸르던 빛이 종적을 감추고 붉은 여명이 떠오르거든 세계는 비로소 눈을 떴다. 대공 저의 시계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흘러야 했으므로 사용인들은 방해가 될 법한 일에 익숙해야만 했고, 익숙했다. 다만 누구도 고요히 대공 저에 머물며 칩거하던 블리쉬의 공자가 흙과 혈액과 오물 따위의 투성이가 된 채로 떠오른 해를 등지며 현관을 여는 날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았으므로 그들은 마냥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소란이 될 법한 파동이 일었다.

 그러나 밀리온에게 그러한 파동이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밀리온은 잠시도 멈추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어쩌면 기다리고 있을 이들이 여즉 어둠에 머물러 있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다시 등을 돌리면 언제나 같은 평화가, 깊은 밤의 장막이, 초록이 그를 반길지도 몰랐다. 밀리온은 양손으로 응접실의 문을 열었다.

 다만 기대는 언제나 얕은 얼음 막 위에 놓였고, 깨지고 녹고 다시 굳거나 굳지 않아 그 아래 얼지 못한 푸른 물속으로 가라앉기 마련이었다.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무엇도 숨을 쉬지 않았다. 다만 나뒹굴어 융단에 아가리를 묻은 빈 유리잔만이.

로단테 2021/09/23  ~ 2021/10/12

밀리온 폰 블리쉬, 러닝 중 그렸던 그림 로그 백업

(순서는 뒤죽박죽입니다...)

글 : 지인분 지원

친애하는 공작님께,

 오늘도 아인시히 제국에 내리쬐는 태양은 밝게 빛나고 나무들은 빛을 받아 싱그러움을 드러내고 있는 계절입니다. 저택을 관리하다보니 시간이 물흐르듯 흘러 어느덧 여름이 되었습니다. 언제나 보내시는 사람을 통해 소식은 받아보셨겠습니다만, 일이 어느정도 정리가 된다면 직접 편지를 써야겠다 다짐해 이렇게 펜을 들어 봅니다.

 아카데미를 졸업식 이후, 동거동락하던 동기들과 짧게나마 헤어짐의 시간을 갖고 아카데미를 졸업하면 블리쉬 가에 걸맞는 사람이 되라 말씀하셨던 지난 날의 약속대로, 제가 몸담고 있던 공작저 대신 당신께서 하사해주신 저택으로 발을 옮겼습니다. 오래되고 방치되어있었으나, 공작저의 별채이니만큼 그 위엄이 고스란히 느껴지더군요. 공작님께서 이를 제게 맡기신 것은 그 위용을 가꾸어 제국에 블리쉬 가의 명성을 다시 한 번 떨치라는 뜻일거라 여겼습니다. 저를 믿고 맡겨주신 일을 해내기 위해 제가 소지하고 있던 것들 중 값이 나가는 물건들을 모두 전당포에 팔아 기반이 될 제드를 마련했습니다. 홀로 자립하라 하셨으나 주어진 것들 중 제 것이 없으니 당신의 말을 온전히 따르지 못했습니다. 다만 공작께선 자비로움이 바다와 같으니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주실거라 믿습니다. 

 마련한 것으로 사용인을 구인하고, 건물을 보수하고 관리를 했습니다. 특히 공작님께서 자주 머무르셨다던 3층의 볕이 잘 드는 방은 더 정갈하게 관리하라고 거듭 지시를 내렸지요. 정원에는 티테이블을 마련하고 정원사를 고용해 정원수들을 가꾸도록 명령했습니다. 아름다운 정원에 작게나마 제가 좋아하는 은방울 꽃을 심었는데, 공작님께서 방문하실 때 즈음엔 꽃들이 다 자라나 대접하는 한 켠에 꽂아둘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럼 보고할 일이 있을 때 다시 편지하겠습니다. 오늘도 제국의 영광이 블리쉬 가와 당신에게 함께하는 날이 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295년 x월 x일 

밀리온 폰 블리쉬 드림

친애하는 당신께,

강녕하셨는지요. 봄바람이 불어 대륙에 활기를 불어넣는 나날들이 계속됩니다. 날씨까지 블리쉬 가를 위해 축복하는 것 같아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처럼 제 마음 또한 들뜨곤 합니다. 이렇게 편지를 적는 연유를 물으신다면, 특별한 일은 아니지만 보고해야할 것 같아 이렇게 펜을 듭니다.

 오늘은 의회 시험의 결과가 있는 날이었습니다. 당신께서 도움을 주겠다며 손을 내밀어주셨지만 과거의 약속은 일절 도움 받지 않고 스스로 일어나라 명하셨으니 이 또한 제가 짊어지고 이겨낼 시련이었습니다. 저는 노력했고, 그 기대에 부응하였습니다. 이번 시험에 합격해, 저는 앞으로 귀족 대표의 상원 자격으로 의회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아카데미에서 만났던 메테나 K. 말레오루스의 합격 소식도 알게 되었지요. 짧게 말씀드리자면, 메테나는 남부에 위치한 말레오루스 남작가의 영애로써 앞으로 블리쉬 가문의 정계 활동에 분명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의회에 블리쉬 가의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이 되길 원하였으니 그리하겠습니다. 황제 폐하의 신임을 사라 명하셨으니 그렇게 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한 가지 빠뜨린 이야기가 있어 사족을 덧붙히자면, 로트실트가의 새로운 후계자가 저를 종종 찾아오곤 합니다. 로트실트가의 일은 공작님께서도 당연히 알고 계실겁니다. 로트실트 가는 예로부터 저희 블리쉬 가의 대리인 자리에 있었으니 제가 예법을 직접 지도해주고 있습니다. 쓸데없는 일이라 생각하실지도 모르지만 그가 귀족 사회에 온전히 녹아든다면 로트실트 가와 이들을 후원하는 블리쉬 가 모두 더욱 빛을 발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그 덕에 가끔 고요하던 저택이 조금 활기를 띄기도 합니다. 

 하늘에 태양이 점차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오늘도 공작께서 평온한 밤이 될 수 있길 바라며 이만 편지를 줄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행하는 모든 일이 공작님을 만족시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296년 x월x일 

밀리온 폰 블리쉬 드림

친애하는 헤르안 공작 각하,

 평안하셨는지요. 비가 많이 온 탓에 아직 보수중인 별채 뒤뜰의 창고가 무너졌습니다. 다른 일로 신경을 기울이지 못한 탓에 일어난 일이라 상심이 크고 제 책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거운 하루입니다. 마음이 무거운 이유는 이 뿐만이 아니니 형님께서 오셔 제 자격을 논하시는 모습에 스스로 부족함을 느낀 하루였습니다. 보통은 이런 일은 보고를 드릴 필요는 없으나 오늘은 글을 쓰고 싶어져 이렇게 편지지 앞에 앉아봅니다. 

 기다리는 당신 대신 달갑지 않은 손님으로 무작정 방문하여 저택을 휘젓고 다니며 비와 흙이 묻은 더러운 신발로 지금은 고즈녁한 모습을 갖춘 이 저택을 걷는 모습이 당신의 이름을 구둣발로 짓밟는 기분이었습니다. 제게 와 이것저것 트집을 잡는 모습이 당신을 온통 부정하는 것 같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당신이 인정하는 후계자이며 저는 한낱 장기말에 불과하니 그의 말에 반기를 들지 않도록 인내하고 또 인내했습니다. 당신을 위해 꽂아 둔 은방울 꽃이 담긴 화병을 집어던졌을 때도 저는 묵묵히 인내했습니다, 그러나 의문을 가졌습니다. 

저는 알고 싶습니다. 어째서 유력한 가주 후보인 그를 두고 저를 입양해 오셨는지, 저를 데려오셨음에도 제게 기약 없는 기다림만을 요구하시는지. 저를 모두 버리고 일궈낸 모든 것들이 진정 의미가 있는 행동들인지. 그래서 당신께 인정받아 당당한 블리쉬 가의 일원이 될 수 있을지.

 ...그러나 이 또한 공작 각하께서 내려주신 시련일 것이라 믿습니다. 이 편지는 당신께 보내지 못할 것 같습니다. 저의 추잡한 욕망은 그 욕망을 담아낸 이 글과 함께 봉인해 제가 간직하도록 하겠습니다.

언제나 제국의 태양 아래 영광을 누릴 블리쉬 가를 위하여.

295년 x월 x일 

보내지 못한, 편지 42장.

주의 : 본, 로그에는 강압적인 상황 묘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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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지인분의 지원.

 많은 이들이 어린 시절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혹은 좋은 기억으로 남아 추억을 그리며 말하곤 한다. 그러나 밀리온에게 어린 시절이란, 기억하고 싶지 않으나 지독할 정도로 생생한 고통스러운 기억일 뿐이다. 블리쉬 가의 분가에서 태어나 귀족이었으나 푸른 눈이라는 이유로 무시당하며 평민만도 못한 삶을 살았다. 아이에게 필요한 사랑과 애정 대신, 그가 들어왔던 것은 녹색 눈이 아님을 한탄하거나 비난하는 이야기일 뿐이었으니 종종 그는 침대에서 그 때의 기억을 가지고 깨어나곤 했다. 

●   ●   ●

 영특했던 밀리온은 자신이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음을 알고 있었으나 그는 어린 아이가 내쫓겨 살아가기엔 이 사회는 잔혹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작은 체구의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숨을 죽인 채, 있는지도 모르게 방에 가만히 앉아있는 일이 전부였다. 그리고 어떻게든 버티기 위해 그들의 비위를 맞추었다. 익숙하게 집안일을 해내고 나이에 맞지 않게 어른스럽게 행동하는 건 그 시절의 괴로움을 반증하고 있었다. 그의 유일한 낙이라곤 우연히 주운 오래된 만년필로 버려진 종이에 별 볼 일 없는 시나 일기를 끄적이는 게 전부였다. 

 그럼에도 결국 그는 6살 나이에 내쫓길 뻔 했으니, 나이프를 쥐는 순서가 틀리다며 기본적인 식사예절조차 지키지 않아 블리쉬 가에 먹칠을 했다는 터무니없는 이유에서였다. 그들이 식사예절 따위를 알려준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억울함을 항변할 수도 없었다. 그랬다면 건방지다며 곱게 쫓겨나는 걸로 그치지 않고 잔뜩 매질만 당하면 다행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리베르트 님께서 그가 남몰래 중얼거리던 기도를 들었기 때문일까. 그 때 마침 헤르안 공작은 그를 양자로 데려가고 싶다며 찾아왔고, 공작의 말에 친가는 밀리온 덕에 콩고물이라도 받아먹을 수 있을 거라 기대하며 그를 팔아버리듯 보내버렸다. 이는 밀리온에게도 나쁜 일이 아니었으니 남은 옷을 대충 기워만든 옷 대신 최고급 비단으로 만든 맞춤옷을 입고 먹다 남은 음식 대신 일류 셰프가 만들어준 최고급 코스 요리를 먹으며 장작조차 제대로 지급되지 않아 추위에 떠는 대신 한겨울에도 이불을 걷고 잘 수 있을 만큼 따뜻한 잠자리는 그가 여태껏 누리고 살지 못했던 귀족의 삶이었고 고작 일부에 불과했다. 

 이유야 뭐가 되었든 밀리온에게 헤르안 공작은 구원의 빛이었으며 그 빛은 찬란한 에메랄드 색이었다. 그 색을 손에 쥐기 위해 그는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 시작이 바로 디하이트 아카데미의 입학이었다. 블리쉬 가의 힘이라면 어렵지 않게 비리로 입학할 수 있었지만 그는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정당히 겨루어 디하이트 아카데미 입학에 성공했다. 그는 자신을 블리쉬 가의 대표라 생각하며 가문에 누가 되지 않게 행동함과 동시에, 고단했던 시절부터 가지고 있던 꿈을 마음 한구석에 간직하고 있었다. 언젠가 정당하게 가문의 일원이 되어 꿈을 펼쳐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그는 자신의 손에 녹빛이 담겨있다 여겼고 점차 자신감을 가지고 가문을 위해 성심성의껏 노력했다. 

●   ●   ●

 그러나 이는 그의 착각이었으니 그는 가문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일들을 알게 되었다.

 올곧고 위대하게 보였던 블리쉬 가의 이면은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당연히 본가에서 직접 행한 일이 아닐 거라 굳게 믿은 밀리온은 이를 곧장 헤르안에게 전달했으나, 이를 묵인하고 있었던 헤르안은 쓸데없는 짓을 하지 말라며 오히려 밀리온을 질책했고, 이 모든 것을 주도하고 있던 장남 레온은 그를 비웃으며 말했다.

쓸모없는 사생아 주제에 건방지게 헤집지 말지? 장기말은 장기말 답게 있으라고.

 아, 밀리온은 그제서야 깨달았다.

 자신은 영원히 저들의 녹빛에 물들지 못할 거라고.

 아무리 발버둥쳐도 자신은 보험책에 불과하니 블리쉬 가문에, 헤르안 공작에게 인정받을 수 없다고. 그러나 이 사실을 알고도 그는 여전히 그들의 녹색을 동경했다. 사람은 갖지 못하는 것을 바라볼 때 오히려 갖기 위해 애를 쓴다고 하던가. 밀리온이 딱 그런 꼴이었다. 그는 절망했다. 자신을 이뤄온 것들이 무너지고 가치가 없다고 느꼈다. 허무함은 그에게 분노를 몰고 왔으니 분노의 화살은 자신의 푸른빛을 향했다. 하늘의 청량함과 같아 좋아하던 푸른색이 이제는 자신을 가라앉히는 심해의 색과 같다며 증오했다. 거울을 마주 볼 때마다 보이는 제 푸른 눈을 파해치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아냈다. 어떻게 해도 그들과 같아질 수 없다고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무의미하게 보내던 어느 날.

 그는 문득 깨달았다. 어차피 사랑과 애정은 예전에도 지금도 없었으니 실망할 필요도 없었다. 가진 적 없는 것을 갖지 못했다고 슬퍼한다면 이 얼마나 멍청하고 시간 낭비란 말인가. 가족들과 형제자매들은 물론, 사용인들에게 조차 무시당하는 자신이 그들과 같아지리라 생각한 것이 얼마나 어리석었던 일인지 깨닫게 되었다. 그러니 그는 그들에게 완전한 블리쉬 가의 일원으로 인정받기 위해 행동하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대신 그들이 원하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훌륭한 장기말이 되어 가문을 위해 일하고 냉대와 모욕마저 블리쉬 가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짊어지겠다고 마음먹었다. 

가문의, 가문을 위한 사람이 되는 데에 자신은 필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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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pengpeng_bak 커미션

 블리쉬 영지의 소작인들은 그리도 충성이 대단하다지요. 영지의 소작료가 그리 명이 드높아도 대륙 어디에서든 블리쉬 령領에서 떠나간 자들을 찾을 수가 없다지 않습니까?

●   ●   ●

 바람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법이라. 풍문 또한 바람을 타고 날아다녔으므로 그것이 사교장에서 영지로, 블리쉬 공작 저로, 끝내 밀리온 폰 블리쉬의 귀로 흘러 들어가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풍문은 풍문이었고, 들추던 이들이 흥미를 잃으면 사그라들 물에 젖은 불씨에 불과했다. 밀리온은 언제나 가문의 누가 되지 않도록 숨죽여 살 것을 배웠으므로 평소 같았다면 신경 쓰지 않았을 터다. 다만 한 가지, 상단의 부흥으로 블리쉬 가는 그야말로 전성기, 전무후무할 대전성기를 이루고 있었으므로 밀리온은 불씨에 얹힌 것이 물 따위가 아니라 기름일 가능성을 떠올렸다. 바람이 멈춰 가라앉지 않는다면. 대륙 저 너머까지 불씨가 퍼진다면. 가문의 누가 되지 말라. 밀리온은 가르침을 상기했다.

 가주인 헤르안 폰 블리쉬 공작과 장자인 레온 폰 블리쉬 백작은 상단이나 그를 배우는 일로 바빴으며 풍문 따위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으므로 밀리온은 이 일이 그야말로 자신의 마땅한 쓸모라 생각했다. 불씨를 꺼트리면, 바람을 잡아다 땅에 가두면, 그리하여 소문이 돌았다는 사실조차 없던 일로 만들면… 공작 저는 언제나 그 견고함을 유지할 것이다. 구석을 만든 벽돌 하나에 제 이름 한 글자 정도야 새길 수 있을 것이다. 밀리온은 나갈 채비를 했다. 문을 열었다.

●   ●   ●

 밀리온은 대동할 수행원 하나 마차 하나 얻지 못하였으나 익숙한 일이었으므로 감히 바라지도 않았다. 밀리온은 걸었다. 공작 저가 굳건한 언덕 아래로, 다시 아래로, 가장 낮은 곳으로. 저택의 불빛 하나 닿지 않는 황망한 대지에 다다르면 이질감을, 아니 기시감을 느꼈다. 순간 울렁였다 가라앉았다. 밀리온은 뒤 돌았다. 공작 저는 이제 흐릿한 윤곽마저도 보이지 않았으므로 이곳이 블리쉬 령의 땅이 맞는가, 하면 낡은 표지판만이 그 대답을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곳은 영지였다. 돌길이 깔렸고, 건물이 들어섰고, 환영받지 못한 유약한 짐승 떼 따위가 골목을 점거했고, 인적 없음에도 생활감이 있었다. 밀리온은 온기 하나 없는 공간을 헤맸다. 지성 있는 생명을 찾았다.

 미로나 다름이 없었다. 수 번을 지나쳐 돌바닥에 난 흠집의 생김새조차 외워버린 골목에서 밀리온은 겨우 하나의 인영을 찾았다. 실례합니다. 다 삭아 안이 텅 비었음이 확연한 나무 상자를 살피던 것에 손을 뻗었다. 인영은 태어나 처음 세상의 소리를 접한 사람처럼 놀랐다. 황급히 거리를 벌렸다. 간극, 인영은 밀리온은 살폈다. 가지런히 정리된 백금발, 윤기가 나 부드러운 살결, 멀끔히 다려진 옷과 광이 나는 구두, 단숨에 밀리온이 공작 저에서 왔음을 알았다.

저는, 저는, 저는 영지를 떠날 생각이 없습니다!

 비명은 단말마다. 괴로이 울부짖던 것이 밀리온을 밀쳤다. 인영은 곧장 또 다른 골목으로 뒤돌아보지도 않은 채 달렸다. 순간 중심이 휘청였다. 폐허에 마땅히 붙잡을 것은 없었으므로 밀리온은 널브러지듯 주저앉았다. 맨바닥이나 흙먼지는 반드시 불결하지만은 않았으므로 손에 묻은 먼지를 털면 곧장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 밀리온은 대수롭지 않게 옷에 붙은 것들을 털어냈다.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다시 헤매기 위하여 방향을 돌렸다.

순간 발에 챈 것은 우연이었다.

 밀리온은 그것을 집어 들었다. 이곳에서 났으리라 감히 믿을 수 없는 고급지, 그을려 찢어진 자국, 익숙한 달필.

…귀하.

이사… …도와… …뵙겠습니다.

 밀리온은 눈을 굴렸다. 부정을 품 안에 고이 접어 넣었다. 필연 아닌 우연은 없는 법이었다.

●   ●   ●

 그리고 밀리온은 말 그대로 내동댕이쳐졌다.

 헤르안 폰 블리쉬는 고상했다. 헤르안은 표리부동한 것은 언제든, 어떤 결과로든 드러나게 된다 여겼으므로 겉으로 보이는 만큼 속내를 꾸몄다. 그러므로 그 속은 부드럽지 않았으나 거칠다고도 할 수 없었고, 밀리온은 혼란스러웠다.

불경한 것!

 누가 네게 이런 것이나 뒤쫓으라 하였느냐! 밀리온은 상황도 감정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한 채로 들려오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조각나 철자 하나하나 읽을 수 없이 흩어진 글귀가, 글이라 하기에도 어려운, 안료로 이루어진 잔해가 흩뿌려졌다. 날았다. 밀리온은 조각을 쫓았다.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니까, 저는…. 목을 붙잡혀 눌리기라도 한 것처럼 목이 울었다. 짓누르는 중력을 느꼈다. 끝내 밀리온은 고개를 숙였다. 이 바닥은 원래도 이런 색이었던가. 지독히도 어울린다 생각했다.

 얌전히 움츠리고 살거라, 밀리온. 네게 바란 것은 그뿐이었거늘…. 네 놈 하나 때문에 레온까지 꼬리를 밟히면 이 가문이 어찌 될 것 같으냐?

 밀리온은 신중을 알았고 신중해야만 할 순간을 알았으므로 이제 스스로 제 목을 잡아 눌렀다. 꺼내고 싶었던 소음을 욱여넣었다. 삼켰다. 네가 정녕 나까지도 모욕할 셈이냐? 비수는 날카로웠으므로 밀리온은 눌렀던 것을 떼어냈다.

…죄송합니다.

 헤르안은 분을 삭였다. 발소리가 들렸다. 밀리온은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했으나, 아니 않았으나 헤르안은 원인을 피하는 것으로 마음을 가다듬고는 했으므로 헤르안이 이 공간을 떴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러므로 남은 것은 자신과 헤르안 뒤에 숨듯 서 있던 레온 폰 블리쉬 둘 뿐이었다. 밀리온은 고개를 들었다. 초록과 파랑의 시선이 마주치면 파랑은 그를 피했다. 다시 고개를 숙였다. 흐응. 가벼운 비음이 들렸다.

네 친부가 블리쉬의 성姓을 가진 것은 맞나?

 암전. 의식하면 시야가 반전되었다. 이 사생아 자식이 무슨 짓이야. 다리 아래 짓눌린 레온이 신음했다. 밀리온은 왼손을 그 목에 가져다 대었다. 무게를 실었다. 자유로운 손을 주먹 쥐어 뒤로 뻗었다. 이대로 내리치면 저 입이 고통으로 신음할까. 제가 그랬던 것처럼 당신도 나가떨어져 내동댕이쳐질까. 그 눈이 감길까. 밀리온은 망설였다. 그러는 동안 다시 초록과 파랑이 마주한다. 초록이 이긴다.

 틈을 탄 레온은 밀리온을 밀쳤다. 본래 향해야 할 방향으로 시선이 내리꽂힌다. 불결하게. 잠시라도 내려다보였음이 수치가 되어 귀 끝까지 붉어진 레온이 그를 피했다. 밀리온은 홀로 남겨졌다. 태어나 처음으로 피가 들끓음을 느꼈다. 그 온도가 과히 뜨거워 데일 정도였다고, 밀리온은 그렇게 생각했다.